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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림문(福臨門)의 추억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19-06-04 (화) 07:27 조회 : 103

어린 시절 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혹은 생일을 맞아 동네 중국 식당에서 먹는 짜장면 한그릇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맛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거기다 탕수육까지 먹는 날이면 그야말로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이사한 날이면, 집안 살림이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동네 중국 식당에서 배달시켜 먹는 짜장면 한그릇은 낯선 환경을 이기게 해 주는 힘이 되었고, 이사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음식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짜장면은 우리의 마음속에 행복한 날 먹는 좋은 음식, 설렘과 함께 나누는 음식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비싸고 좋은 음식도 접하게 되지만, 여전히 짜장면은 특별한 날 먹는 음식으로 마음 한편을 채우고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아무리 푸짐하게 먹어도 짜장면 반 그릇 정도는 먹어야지 맛있게 먹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짜장면은 맛과 문화를 넘어 영혼을 흔드는 '소울푸드(Soul Food)'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공부했던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인근에도 중국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훌린(Fulin)"이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가난한 신학생들이 적은 돈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특별한 날 찾던 동네 중국 음식점처럼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날,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날, 아이가 상 받은 날, 손님이 오신 날 등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곳에서 우리들끼리 축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훌린'을 다시 찾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의 목회학박사 과목의 강사로 초청받았습니다. 받아 놓은 시간은 빨리 다가온다고, 몇 달 전에 약속할 때만 해도 한참 남았다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115주년을 맞아 교회의 이런저런 행사를 치르고 나니 약속한 날짜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강의실에 들어섰습니다. 한국, 미국, 그리고 여러 선교지에서 사역하시는 목회자들의 열정 어린 시선이 저에게 쏠렸습니다. 이민 목회 현장에서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삶으로 살아내고자 애쓰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준비해 간 내용의 절반을 겨우 마쳤는데 제게 주어진 시간이 훌쩍 흘렀습니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수업 참여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된 강의를 마치자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업의 일부로 학생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현장 목회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예약해 둔 식당이 바로 '훌린'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추억이 담긴 식당이었습니다. 그 식당으로 오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 식당이 어디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주 다니던 식당인데, 그곳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났다고 제 기억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추억이 담긴 장소로 향하는데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의 추억이 아롱아롱 피어올랐습니다. 주차장은 새롭게 포장되어 있었고, 몇 대 더 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둔 것을 빼면 식당 간판이며 현관이며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애써 덤덤한 체하며 낯선 익숙함의 자리로 들어서는데, 10여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은 사라지고 엊그제 방문한 식당처럼 느껴졌습니다. 식당 여주인은 세월의 흐름도 비껴간 듯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부지런히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빈 접시를 치우던 히스패닉 청년은 가지런한 머리 모양은 변함이 없는데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일하는 모습에서 책임감을 지키는 성실한 인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일하던 잘생긴 주인 남동생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때 엄마 손을 잡고 쫓아다니던 주인 딸도 이제는 어른이 되었을 텐데....' 차마 묻지 못하고 계산을 하는데, 주인도 저를 어렴풋이 알아봤는지 "지금 여기 안 사시잖아요?"라고 물었습니다. "예 이사 가서 오랜만에 왔어요." 저의 짧은 대답에 주인도"건강하세요."라고 여러 번 인사하는 퉁명한 목소리에는 자주 못 올 것을 알기에 차마 '다시 오세요.'라고 인사하지 못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식당을 나서는데 "Fulin(훌린)"이라는 영어 간판 아래 붙은 한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복림문(), 복이 임하는 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복림문'에서 짜장면 한그릇에 위로받던 제가 이제는 목회학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위로할 수 있음이 감사했습니다. 그날 함께 공부한 학생들에게도 같은 복이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복림문의 추억을 되새기며 '복이 임하는 문'을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