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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

글쓴이 : LA연합감리교회 날짜 : 2019-05-26 (일) 07:24 조회 : 46

나는 아무런 변화 없이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가정을 꾸릴 때까지만 해도 나이 든다는 것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청첩장을 받고서야 세월이 나를 비껴가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올해 들어 동료 목사님들 자녀 결혼식에 오라는 청첩장이 자주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도 동료 목사님 딸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저보다야 연배지만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고, 또 같은 교회에서 전도사로 함께 사역했던 목사님이기에 가족 같은 마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더구나, 그 목사님의 딸을 어릴 때부터 보아 왔기에 훌쩍 커서 시집을 간다는 사실이 대견하고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결혼식은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파킹랏을 지나 결혼식이 열리는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 만난 화사하게 꾸며진 흰색 테이블과 야외무대는 새롭게 가정을 꾸린 신랑신부와 함께 나눌 첫 만찬의 풍성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서는데 양가 부모가 밖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서운함을 환한 미소에 애써 감추고 서 있는 동료 목사님과 사모님을 보는 순간 좋은 말로 축복해주고 싶었는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저 굳게 잡은 손으로 축하의 마음만 표현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양가 어머니가 화촉을 밝히고, 화동과 들러리들이 경쾌하게 입장했습니다. 신랑 입장 순서가 되었는데 남자 둘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뒷모습만 봐서는 신랑과 친구라고 생각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신랑이 아버지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입장했던 것이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야 하는 아들의 어깨에 얹은 손은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신부가 입장할 차례입니다. 아버지의 팔에 살포시 손을 얹은 신부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습니다. 모두가 일어서서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위 될 사람에게 딸을 맡기고 자리에 앉는 아버지의 뒷모습에는 아쉬움과 감사, 기쁨과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목사님 딸 결혼식답게 찬양으로 예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찬양인도자의 기타반주에 맞춰 하나님께 경배하는 찬양과 헌신을 다짐하는 찬양을 부르며 예식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선포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동부에서 공부할 때 신앙생활을 함께 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 목사님이 결혼 예식의 주례를 맡았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에 매끈하게 결혼예식을 인도하던 목사님의 주례사가 이어졌습니다. 주례사를 시작하면서 신부의 아버지를 나오라고 해서 통역을 부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본문을 중심으로 주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했는데도 신부 아버지는 통역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신부의 아버지는 분홍색 나비넥타이를 한 채 고개만 끄덕이며 주례사를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10여 분 주례사가 이어지고 나서야 신부 아버지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자신은 통역(Translation) 대신에 해석(Interpretation)을 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는 오늘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는 말로 영어로 한 주례사를 한국어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첫째는 교회 잘 다니고, 둘째는 부모님께 잘하고, 셋째는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넷째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주 안부 전하라고 했습니다. 신부 아버지의 해석이 하나둘 나올 때마다 웃음도 함께 나왔습니다. 주례사에 나온 내용이 아니라 신부 아버지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주례사 통역을 맡은 신부 아버지는 결국 오늘 주례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잘 살아!"라는 말이라고 하고는 자리에 앉아버렸습니다. '주례사 전체를 통역하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텐데 밥은 언제 먹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짧고 재치 있는 주례 해석은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한 가정이 탄생하는 자리에 증인으로 참석해서 축복하고 돌아오는 제 마음도 흐뭇했습니다.

"잘 살아!" 모든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며 하고픈 말일 것입니다. 시집가는 딸에게 해 줄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밤이 새도록 해도 못다 할 말은 그저 마음에 담고 "잘 살아!"라는 말로 자신의 속 깊은 정을 표현하는 신부 아버지의 모습에 하나님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하나님도 딸 시집보내는 심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 살아!"라고 말입니다.